맨위로가기

하타나카 겐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타나카 겐지는 육군 군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의 항복을 막으려 쿠데타를 시도한 인물이다.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제3군 참모로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며, 육군성에서 근무했다. 1945년 8월, 그는 궁성 사건을 일으켜 천황의 항복 연설 방송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결했다. 그는 자결 직전 사세구와 유서를 남겼으며,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암살자 - 덴지 천황
    덴지 천황은 7세기 일본 천황으로, 다이카 개신을 주도하고 백제 부흥을 지원했으며, 오미 율령 편찬 등 국가 체제 정비에 힘썼다.
  • 암살자 - 자객
    자객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암살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일반적인 암살자와 구별되며, 동양 역사 속에서는 대의나 의리에 의해 암살을 행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고, 선거에서는 특정 정당에서 탈당한 정치인에 맞서는 대항 후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 1945년 자살 - 요제프 괴벨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선전 능력으로 나치당의 권력 장악에 기여하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서 독일의 문화와 언론을 통제하며 전쟁 선동에 앞장섰으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으로 평가받고 베를린 함락 직전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 1945년 자살 - 하인리히 힘러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친위대 사령관으로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으며, 1945년 연합군에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 - 김영주 (1920년)
    김영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김일성의 동생이자 김정일의 삼촌이며, 한때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김정일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고,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북측 대표,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 - 오에 스에오
    오에 스에오는 특정 시기, 지역 또는 현상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를 담고 있으며, 역사, 주요 특징, 한국과의 관계, 국제 관계, 전망과 과제 등을 다루는 문서이다.
하타나카 겐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하타나카 겐지 소좌
이름하타나카 겐지
출생일1912년 3월 28일
출생지일본 교토부
사망일1945년 8월 15일
사망지일본 도쿄
별명해당 정보 없음
군사 정보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34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소좌
참전제2차 세계 대전
부대해당 정보 없음
지휘해당 정보 없음
상훈해당 정보 없음
기타 정보
가족해당 정보 없음
이후 활동해당 정보 없음
묘소해당 정보 없음
서명해당 정보 없음

2. 생애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의 항복 결정에 반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새벽 궁성 사건을 일으킨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쿠데타 과정에서 자신의 상관이자 항복 수용 입장이었던 근위사단장 모리 다케시 중장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쿠데타는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의 반대와 동부군의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쿠데타가 미수에 그치자, 하타나카는 같은 날 오전 11시경 고쿄 앞 니주바시와 사카시타몬 사이 잔디밭에서 동료 시이자키 지로 중좌와 함께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쇼인 선생의 뒤를 따르고자 자결하여, 무사시의 들판에서 썩어간다. 을 위해 자기의 도, 나라도, 길도, 일시 중단될 것이나, 그러나, 백 년 후에는 반드시 길과 함께 다시 살아난다. 호국의 귀신이 되어, 나라와 함께 반드시 칠생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세구를 남겼다.

: 지금은 다만 생각에 남는 일 없어라 암운 걷힌 임금의 세상이 된다면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교토부 후나이군 다카하라촌(현 교토탄바정) 출신으로, 지주인 하타나카 에이지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교토부립 소노베 중학교를 4년 만에 수료하였으며, 본래 제3고등학교 문과 진학을 희망했으나 주변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거쳐 1934년 6월 육군사관학교 본과(46기)를 졸업했다. 졸업 성적은 338명 중 64등이었다.

같은 해 10월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도쿄도 세타가야구 시모우마에 있던 야포병 제1련대에 배속되었다. 당시 이 부대에는 이다 마사타카(45기)도 소위로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이후 육군 포공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0년 6월에는 육군대학교(53기)를 졸업했다.

1935년경부터는 이다 마사타카 포병 소위, 다케시타 마사히코 보병 중위(42기) 등과 함께 도쿄 대학 교수였던 히라이즈미 스스무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2. 2. 군 경력

교토부 후나이군 다카하라촌(현 교토탄바정) 출신으로, 지주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교토부립 소노베 중학교를 4년 수료한 후, 주변의 권유로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거쳐 1934년 6월 육군사관학교(46기)를 338명 중 64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34년 10월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세타가야구 시모우마에 위치한 야포병 제1련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육군 포공 학교에서 수학하고, 1940년 6월에는 육군대학교(53기)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제3군 참모로 참전했다. 1942년 3월부터 7월까지 필리핀에 파견되었으며, 같은 해 4월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1942년 8월 육군 소좌로 진급하였고, 이후 육군성 병무국 과원(병비과) 및 군무국 과원(군무과)을 역임하며 중앙 부서에서 근무했다.

3. 궁성 사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 육군성 군무국에서 복무하던 하타나카는 포츠담 선언 수용, 즉 일본의 항복을 막으려는 일본 장교 그룹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45년 8월 14일부터 15일에 걸쳐 궁성 사건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타나카는 육군 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장군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으나,[2] 다른 장교들을 조직하여 황궁과 궁내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쿠데타 성공을 위해 고위급 지원이 필요했던 그는 제1근위사단 사령관 모리 다케시 중장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모리 중장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하타나카는 그를 사살했다.[3]

하타나카와 공모자들은 이후 몇 시간 동안 천황의 항복 연설 녹음물을 찾아 방송을 막으려 했으나, 녹음물을 찾는 데 실패했다. 대신 NHK 방송국 건물을 점거하여 연설 방송을 막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고위급 지원 확보와 녹음물 탈취에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동부군 사령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쿠데타를 포기했다.[4]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하타나카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1시경 황궁 앞 광장(니주바시와 사카시타문 사이 잔디밭)으로 갔다. 그곳에서 동료 공모자인 시이자키 지로 중좌와 함께 자결했다. 하타나카의 주머니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세구가 발견되었다:[5]



이제 나는


아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두운 구름이 사라진


천황의 치세가 되었으니


4. 사세구 및 유서

궁성 사건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 하타나카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1시경 황궁 앞 광장으로 갔다. 그는 니주바시와 사카시타문 사이 잔디밭에서 동료 공모자인 시이자키 지로 중좌와 함께 자결했다.[5]

하타나카의 주머니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발견되었다.

: 쇼인 선생의 뒤를 따르고자 자결하여, 무사시의 들판에서 썩어간다. 을 위해 자기의 도, 나라도, 길도, 일시 중단될 것이나, 그러나, 백 년 후에는 반드시 길과 함께 다시 살아난다. 호국의 귀신이 되어, 나라와 함께 반드시 칠생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세구도 함께 발견되었다.[5]

: 지금은 다만 생각에 남는 일 없어라 암운 걷힌 임금의 세상이 된다면

: 今はただ 思ひ殘すこと なかりけり 暗雲去りし 御世となりなば|일본어

5. 인물상

1967년 일본 영화 『일본의 가장 긴 날』에서는 혈기 넘치고 열정적인 성격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하타나카 겐지는 순박하고 조용한 문학 청년과 같은 인상이었다고 평가된다. 육군대학교 시절에는 모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영화 공개 당시, 이러한 실제 모습과 다른 묘사에 대해 모교인 소노베 중학교 관계자들이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6]

6. 대중 문화 속의 하타나카 겐지


  • 영화 ''일본의 가장 긴 날''
  • * 1967년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판: 배우 구로사와 토시오
  • * 2015년 하라다 마사토 감독판 (한국 개봉명: ''8월의 제국''): 배우 마츠자카 토리
  • 텔레비전 드라마 ''역사의 눈물'' (1980년, TBS): 배우 타무라 료
  • 텔레비전 드라마 ''옥음방송을 만든 남자들'' (2015년, NHK BS 프리미엄): 배우 타카하시 잇세이
  • 1954년 영화 ''일본은 지지 않았다''에서는 하타나카를 모델로 한 '하타 소좌'라는 인물을 배우 호소카와 토시오가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Hoyt, 1986
[2] 서적 Toland, 1970
[3] 서적 Toland, 1970
[4] 서적 Toland, 1970
[5] 서적 Toland, 1970
[6] 뉴스 皇居占拠、畑中少佐の素顔は… 「日本のいちばん-」で再び光 http://www.kyoto-np.[...] 2015-08-2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